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그런 행운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마가 두 장 들어있는 너구리 라면이라니. 오동통 면을 후루룩한 다음 빨간 국물을 들이키기 전 집어먹곤 하는 그 다시마가 두 장이라는 건 꽤 기발한 상상이었다. 물론 그러지 말란 법도 없지만 그래도 너구리 한 봉에 다시마 두 장을 먹었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건 말이 안 된다고 봤다. 술자리 농담으론 꽤 괜찮지만, 대기업 농심을 바보로 아나......

하지만 너구리 한 봉에 다시마 두 장은 충분히 가능했다. 왜냐면, 사정은 대략 이러하다. 너구리 라면 공장 컨베이어벨트가 달린다. 동그란 모양의 꼬불꼬불 면발 덩어리가 그 위에 줄을 선다. 벨트 끝에서 이 덩어리는 떨어져 새빨간 포장지 속으로 쏙 들어가겠지. 그 전에 아마 어느 지점에선가 스프 한 봉, 다시마 한 장이 면발 위로 툭 떨어져 나란히 포장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흰 머릿수건을 쓴 노동자가 다시마를 일일이 손으로 쪼개 넣는다. 이런, 믿기 힘든 전근대적인 광경.

‘너구리 한 봉, 다시마 한 장’의 믿음은 현대 자본주의 대량생산 체제를 너무 과신한 데서 비롯됐다. 기계화 역시 흰 머릿수건 아줌마(그냥 떠오르는 성차별적 이미지를 그대로 갖다 쓴다)를 대체할 수 없다고 농심은 설명한다. 이 아줌마의 실수가 ‘너구리 한 봉, 다시마 두 장’을 만들어낸다. 이건 불량품이다. 다만 불량품인데, 소비자는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은 불량품이다. 어떤 소비자는 이 불량품을 '로또'라 부른다. 이 불량품의 피해자는 소비자가 아니다. 대기업 농심이 손해를 본다. 그 조그만 다시마 한 장 가격이 얼마나 되겠느냐만.

음, 그리고보면 이 기분 좋은 불량품을 계속, 또 자주 보기 위해선 ‘노동의 종말’ 따윈 없어야 할 텐데. 허나 언젠가 리프킨의 예언은 실행될테고, 우리의 다시마엔 보다 평등한 날이 오겠지. ‘너구리 한 봉, 다시마 두 장’ 같은 소소한 즐거움이 사라지는 게 진보라면, 나는 진보를 거부할 것인가. 겨우 다시마 두 장 따위에 '사람 사는 세상' 같은 구호가 곁들여 있었단 말인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라는 진부한 말이 하고 싶어진다. 아직 그런 공장이 있다.

...... 나의 비좁은 자취방 찬장엔 너구리 네 마리. 오늘따라 흰 머릿수건 아줌마가 손짓하네, 너구리 한 마리 몰고 가세요.

 

>>> 아래는 한겨레출판 보도자료

 

이 책은 제지 공장부터 콘돔, 간장, 가방, 도자기, 엘피, 맥주, 그리고 김중혁 글 공장까지 호기심이 가득한 소설가 김중혁이 다양한 공장들을 다니면서 적어 내려간 시간과 기억, 속도와 사람에 대한, 느긋하고 수다스러운 글과 그림을 엮은 산문집이다. 15개의 공장 산책기와 더불어 노트 탐험기, 번뜩이는 가방 디자인 하기, 맥주 만취 시음기 등 작가의 재기 넘치는 토크(talk)와 인공 눈물, 글로벌 작가, 안경, 보온병, 시간표 등 사물을 담은 그림 등도 엿볼 수 있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이 공장에서 어떻게 생산되는지 훔쳐보고 싶은 마음에, 물건을 만든 장소에 가서 만드는 모습을 보면 물건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공장 산책기를 시작했다고 밝힌다. 소리와 도시, 기기 같은 사물들을 아날로그 감성과 함께 깊이 있게 만들어내는 그의 글들이 어떤 기계의 발명과 비슷해 보이기에 ‘발명가’라는 별명이 붙기도 한 김중혁. 그는 실제로 공장을 다니면서 공장에는 사람이 있고,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이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가 생각하는 공장의 모습은 훨씬 더 입체적이고 복잡할 것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소설가 김중혁은 고민한다. “왜 나는 손에 잡히는 무엇인가를 누군가에게 줄 수 없는 것일까. 외투를 만들거나 가방을 만들어서 직접적으로 제공할 수 없는 걸까.” 그는 소설가가 되고 난 후에도 그런 고민을 자주 했다. “내 소설은 어떤 ‘물건’이고, 어떤 ‘제품’일까. 나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리고 엄청난 소음으로 꽉 차 있고, 묘한 냄새가 떠다니며, 기계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공장이, 만들어지고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지고 있는 공장이 부러웠던 때가 있었다. 소음이 리드미컬하게 들리고, 화약약품이 향기롭게 느껴질 만큼.

지금은 나름대로 답이 생겨 소설이 어째서 필요한지, 글이 왜 중요한지도 어렴풋하게 알 것 같다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비슷하게 살아가고, 연결되고, 서로가 서로를 돕고, 서로의 부분을 생산하고,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조립품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지구라는 거대한 공장에서 서로를 조립하고 있는 중이라고.

 

 

제8호 태풍 '너구리' 북상, 농작물 피해 당부

 

언제나처럼 스크롤을 내리며 뉴스를 읽는데 '데자뷰'마냥 야릇한 느낌을 받은 날이 있었다. 여야가 세월호 국정감사 증인 출석을 두고 어떤 분을 불러야 하느니 마느니 싸우다가 헤어졌다는 뉴스를 볼 때였다. 순간 이게 오늘 나온 뉴스가 맞나 싶은 의문이 머리 속으로 스쳐 들어갔다. 그래서 네이버에 그 분의 이름과 '파행'이란 두 글자를 나란히 넣어 검색해 봤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에도 여야는 그 분의 증인 소환 문제를 두고 싸우다 결론 없이 헤어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뉴스가 날짜만 달리하며 반복된다. 내가 뉴스(NEW-S)의 철자를 잘못 아는 건 아닐까.

유가족들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 중이다. 곳곳에서 "잊지 말자"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건 분명 누군가는 잊어가고 있거나 벌써 잊었기 때문이다. 종편 채널에 자주 등장하는 모 교수가 "세월호 얘기를 하면 시청률이 안 나온다. 국민들은 이제 관심이 없다"고 말했던 통화 내용이 떠오른다. 해경을 해체하고, 유병언을 '죽은 채'로 잡고, 대통령이 휴가를 가고, 재보선이 지나니 이제 정말 끝인가 싶다. 누군가 "세월호는 이제 끝났다. 잊어라"라고 말해도 반박하기가 괜히 엄한 분위기다.

시국이 이러니 이 책이 인기가 없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경제학자 우석훈의 <내릴 수 없는 배>. '세월호로 드러난 부끄러운 대한민국을 말하다'라며 세월호 참사 100일쯤 이미 나왔지만 언론을 별로 타지도 않았다. 세월호 이전의 '일상'이란 게 그닥 편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모두 소중한 그 '일상'을 찾아가려는 마당에 우석훈은 말한다. "세월호를 계기로 우리는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더 위험해질 것이다" 그 놈의 일상으로 돌아가려는데 별안간 우석훈이 훼방을 놓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전개된 일련의 상황에 대한 우석훈의 해석에서는 대한민국에 대한 자비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사람들이 슬픔과 패닉에 빠져 있는 상황을 악용한 것"이라고 볼만한 일들이 이미 벌어졌거나,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또 그게 현대 자본주의의 기본 방향이라는 거다. 이른바 '재난 자본주의'다. 우석훈이 예로 들었듯 제임스 딘이 나온 영화 <에덴의 동쪽>에서 주인공이 2차 세계대전이란 대재난을 앞두고 곡물 가격 상승을 예측해 콩을 매점매석한 행위 따위를 말한다. 이걸 대한민국에서도 세월호 참사 이후 누군가 하고 있다는 거다.

일단 청와대. 정부가 총리실 산하로 국가안전처를 따로 신설하겠다고 한 발상을 우석훈은 "대통령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면피용 시스템"이라고 평가절하한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관리 시스템은 그야말로 '아노미'라고 말한다. 해경은 공중분해될 운명이고 새로 생긴 시스템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만 참사에 대한 법적·행정적 1차 책임을 절대로 지지 않게 됐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럼 세월호 참사는 기본적으로 배 사고니까, 이제 배는 좀 달라지려나? 우석훈은 절레절레. 일단 대통령도 앞으로 배를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를 일절 안 했다는 거다. 이제 연안여객 사업이 어려워질 것은 불보듯 뻔한데 정부는 청해진해운 재산을 몰수해 보상금을 채워넣기 위한 '단 하나의 노력'만 할 뿐이다. 배의 수명을 연장해 주고 운항 관리를 느슨하게 해온 점이 세월호 참사의 주원인으로 꼽히는데 정부는 말이 없다. 우석훈은 배가 더 위험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은 '내릴 수 없는 배'이다. 4월 16일 오전 8시52분, "살려주세요"란 단원고 학생의 신고를 목포해경과 전남소방본부가 '뺑뺑이' 돌렸듯, 대한민국은 세월호 참사 100일이 훌쩍 넘도록 국민의 안전에 대한 논의를 무한 뺑뺑이 돌리고 있다. 우린 반복되는 세월호 특별법 뉴스처럼 분명 또 데자뷰를 겪을 것이다. 그러고는 "대한민국이 원래 이렇지, 뭐"라며 똑같은 대사를 반복할 터. 내릴 수 없는 배를 탔다. 세월호를 탄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야 그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책은 얇다. 그래도 우석훈이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서부터 앞으로 진행될 사회적 논의의 주제들까지 정리를 잘한 것 같다. 썩 만족스럽진 않지만 소설 <모피아> 이후 자꾸 문학적인 욕심을 내는 우석훈의 노력 때문에 읽기에도 어렵지 않다. 그러니 출퇴근길에서만이라도 이 책을 많은 사람이 한번쯤은 들었으면 좋겠다. 가슴이 자꾸 세월호를 잊으라고 하면 일단 머리로라도 읽어야 하지 않나 싶다. "정말 '잊히는 것'이 너무나 애달픈 이 영혼들을 기억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차원에서라도 말이다.

 

제발 좀 내렸으면 하는 놈들은 절대 내리지 않는다

 

24.19㎡. 서른살이 돼 처음 자취를 시작한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의 넓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의 내 방보다 작다. 자연스럽게 많은 것들이 제거됐다. 책상, 책장, 옷걸이, 오디오 등등. 여기에 살면서부터는 철저한 ‘기능주의자’가 됐다. 의자는 사람이 앉기 위한 크기면 충분하고, 식탁과 책상은 따로 마련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불편한 게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물의 제 의미를 찾아준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아니, 식탁은 책상이 되기도 하면서 의미가 더 풍부해졌다. <작은 집을 권하다>는 대략 이런 내용이다.

일본인 저자가 쓴 이 책은 ‘스몰하우스’(Small House)에 대해 설명한다. 3평(약 10㎡) 정도의 작은 집에 거주하는 6명을 취재해 쓴 책이다. 물론 저자도 스몰하우스에 산다. 어느 산 깊숙이 버려진 듯한 아주 보잘 것 없는. 삽도로 실린 그의 집을 보면 누구나 ‘일본인들은 역시 참 괴짜군’이란 생각이 들 거다. 미국과 호주에 거주하는 그의 취재 대상들이 사는 집은 좀 다르다. 그것은 얼핏 보기엔 컨베이어 벨트에서 대량 생산한 주택처럼 엇비슷하게 깔끔하다. 주목할 것은 외관이 아니라 그 속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많은 이들이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무리가 없는 작은 집을 갖자”고. 책에 등장하는 사례에는 주택 융자에 치이다가 결국 작은 집을 갖게 됐다는 사람도 있다. 다른 부류도 있다. 도시에서 그럴 듯한 전문직을 갖고 있지만, 본인 나름의 철학으로 인해 일부러 작은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이들은 입을 모아 증언한다. 작은 집이 마음의 평안을 갖게 했노라고, 저자는 이를 ‘개인정신주의’라 부른다. 이어 스몰하우스 운동의 의의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작은 집에 살다보면 결국 환경에도 도움이 되는 효과를 발휘하는 예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라마르 알렉산더의 작은 집. 모두가 전원일기를 쓰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럴 것 같다.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이 늘어나면 이 땅에 그만큼 낭비는 줄어들 것이고, 지구는 좀 덜 아플 거다. 스몰하우스 운동의 의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가 물었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그가 내린 답은 스몰하우스 운동의 실행자들보다 가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톨스토이를 읽었을진대 세상은 ‘크기’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했다.

왜 그러냐고? 모르겠다. 아는 것은 이 책이 제시하는 스몰하우스 운동에 많은 한계와 난관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는 거다. 사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싱글 혹은 2인 커플이다. 자녀가 있을 경우에 적절한 스몰하우스의 모델은 보이지 않는다. 또 대부분의 작은 집이 한적한 시골에 자리잡았다. 스몰하우스의 도시적 모델은 언급되지 않는다. 과연 이 많은 인구가 너른 들판과 산골짜기 곳곳에 스몰하우스를 짓고 사는 것은 친환경적인가. 모두가 전원일기를 쓰고 있을 수는 없다.

저자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심지어 황당하기까지 한다. “식량을 비축해두기보다는 신선한 재료를 마켓에서 사다 먹는 게 더 좋다. 언제 입을지 모를 옷가지들을 상자에 넣어 쌓아두기보다는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 기분에 가장 잘 맞는 옷을 구입하는 게 낫다”, “식사는 얼마든 밖에서 할 수 있고, 세탁이 필요할 때는 동전 빨래방을 사용하면 된다. 공공도서관은 자기만의 거대한 서가가 된다” 등등. 그 고결한 ‘개인정신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나를 탓해야 하는 걸까.

 

니가 사는 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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