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졸업생'에 해당되는 글 4건

  1. 사람 대신 벌을 받는 집
  2. 약하지만 깊은 건축 (1)
  3. 엄마야 누나야 작은 집 살자? (2)
  4. DDP는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다 (4)

집들은 마치 사람 대신 벌을 받는 것 같다.
– 본문 중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옥 파괴를 언급하며

역사는 공정하지 않다. 우리가 배워온 역사는 언제나 당대의 권력자들 혹은 승리자들에 의해 여러 번 고쳐지고, 심지어는 구체적인 의도 하에 아예 각색되거나 삭제되어온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는 누군가의 입맛대로 편집된, 그 자체로는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

영국의 건축 저널리스트 로버트 베번Rovert Bevan의 <집단기억의 파괴>는 그런 역사 왜곡∙파괴행위가 건축 등 구조물의 훼손∙파괴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적으로 분류되는 국가나 민족, 혹은 인종의 역사를 파괴하기 위해 군사적인 목적과 관계없는 다분히 고의적인 물리적 파괴행위가 자행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 책은 "건축에 가해진 탄압"에 대한 보고서다.

건축이 탄압의 대상이 된다고? 이상하게 들린다. 베번은 건물 자체는 정치적이지 않지만, 그것이 어떻게 건축되고 평가 받고 파괴되느냐에 따라 정치화된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벽돌과 돌이 가지는 의미는 실로 변화무쌍해진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물을 두고 특별히 애틋한 감정을 느끼거나 특정한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는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을 누군가 고의적으로 불태우거나 망가뜨린다면, 우리는 슬픔을 느끼거나 때론 분노할 것이다.

책에서 다루는 '탄압받은' 건축의 예시는 스케일scale만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에 담긴 궁극적인 목적은 기억의 망각, 기록의 상실을 통한 역사적 존재(국가, 민족, 인종, 계급 등)의 근거 자체를 부정함에 있다.

돌덩이 따위가 알리 없는 이 목적을 위해 정말 한참을, 그리고 많이도 부수고 부수어 왔다ㅡ프랑스 혁명시기의 공화주의자들은 귀족의 저택과 바스티유 감옥을, 히틀러의 나치스는 유대인의 가옥과 시너고그를,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은 티베트의 수천 개 수도원을,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을, 알 카에다는 미국의 세계무역센터(WTC)를…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국지적인 예들까지 이르면 실로 무수하다. 그리고 그만큼 무수히 사라져왔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할 때, 그리고 그 강점에서 조선이 해방될 때 우리도 그런 과정을 주고 받았다.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가는 시민혁명군

 

탈레반이 '우상 숭배'를 이유로 파괴한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

저자는 '파괴'에 관해 실컷 늘어놓은 후, '재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재건이나 복구 행위 역시 역사의 위조에 일조할 수 있으니(마치 파괴의 역사가 없었던 것처럼), 이에 대한 경계와 비판적 시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재건이나 복구가 따른다고 해서 역사가 복원됐다고 말할 순 없기 때문. 정말, 역사는 그 자체로 온전히 사실일 수 없고 온전하지도 않다. 우리에게 믿을만한 역사의 진본이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 답답하다. 로버트 베번은 그나마 겨우 건축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오랜만에 심시티나 한판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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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하지만 깊은 건축

 

일본 건축가 쿠마 켄고Kuma Kengo의 작품을 접하면 그 입면을 구성하는 패턴의 독특함에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나처럼 무심한 건축학도라면 “일본 건축가답네"라고 한 마디 툭 던지고 말겠지만. 그런 '스타일리쉬'한 패턴을 보이는 건축이 오모테산도를 걷다보면 정말이지, 자갈마냥 발에 채인다. 켄고상의 <약한 건축>은 이렇게 그냥 훑어보기 십상인 입면 패턴이 지닌 불순한 이데올로기를 설파한다. 켄고상에게는 이 이데올로기의 뿌리가 생각 외로 깊다. 그의 건축도 표면에 그치지 않고 깊이를 갖는다.

이 책은 2004년 출간됐다. 당시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잃어버린 15년'쯤을 맞을 때다. 쿠마가 이 책에서 "건축은 세 가지 숙명-크기, 자원 낭비, 긴 수명-때문에 분명 미움을 받아 당연하다"고 주장한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우리도 부동산 경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10여년전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건축에 대한 거부감이 보다 확산됐다. (영화 <건축학개론>은 어디까지나 낭만적 첫사랑 이야기일 뿐이다) 켄고상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볼 만하다.

쿠마는 느닷없이 잘 알려진 경제학자 케인스를 소환한다. 미국의 대공황을 건축·토목에 대한 대규모 공공투자로 돌파하고자 했던 그 케인스다. 쿠마는 사실상 "케인스의 정책에는 시간에 대한 배려가 빠져 있다"며 "단기적인 처방을 거듭하는 일이 케인스 정책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쿠마는 건축 정책을 활용한 경기 부양을 꿈꾸는 케인스를 비판함으로써 "이 시대 건축에 필요한 것은 접합"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접합'의 필요성은 시간·공간·물질, 어느 것도 예외는 없다. 짓고 부수고 또 짓고, 그렇게 지은 건축은 도도한 랜드마크로 남으며, 이 랜드마크의 물성은 하나 같이 고고한 콘크리트 같은 것. 쿠마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한다. 가만 보니, 그의 작품 상당수에서 목재로 조립한 듯한 패턴이 눈에 띈다. 우리가 쉽게 '패턴'이라 부른 것들은 켄고상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접합'의 외부적 표현이다. 이 표현이 켄고상 건축의 표면과 깊이, 전체를 관통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쿠마는 명확함을 주장했던 모든 유행을 공격한다. 필로티에 상자를 얹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기단에 상자를 얹은 미스 반 데 로에Mies van de Rohe가 줄곧 도마에 오른다. 반면 이들에게 사실상 패배한 데스타일De Stijl 건축의 복합성에는 아쉬움을 표한다. 거대 공공 건축에서 흔히 나타나는 인클로저(Enclosure, 폐쇄성) 현상은 금융 시스템 내의 파생상품만큼이나 도시에 해가 되는 어떤 것이다. 온갖 왜곡을 일삼으며 결과 외엔 어떤 과정도 보여주지 않는 건축 사진도 경계 대상이다. 켄고상은 앞서 말했듯 시간·공간·물질을 넘나드는 '접합'의 이념으로 중무장했다.

<약한 건축>. 이 책에 '약한 건축'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대목은 없다. 다만 쿠마가 비판하는 대상들을 '강한 건축'으로 놓고 보면 그 개념을 미뤄 짐작함이 가능하다. 쿠마의 대표작인 '대나무주택'(Great Bamboo Wall) 등 목재로 이뤄진 작은 패턴 단위를 접합하는 식의 작업을 보면, 그는 확실히 '약한 건축'을 하고 있다. 그리고 켄고상은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강하리라는 역설을 믿는 듯하다. 그가 추구하는 건 약한 건축이지, 얕은 건축은 아니다. 그의 사상도, 공간도 깊다.

쿠마상이 맞나요, 켄고상이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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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9㎡. 서른살이 돼 처음 자취를 시작한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의 넓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의 내 방보다 작다. 자연스럽게 많은 것들이 제거됐다. 책상, 책장, 옷걸이, 오디오 등등. 여기에 살면서부터는 철저한 ‘기능주의자’가 됐다. 의자는 사람이 앉기 위한 크기면 충분하고, 식탁과 책상은 따로 마련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불편한 게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물의 제 의미를 찾아준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아니, 식탁은 책상이 되기도 하면서 의미가 더 풍부해졌다. <작은 집을 권하다>는 대략 이런 내용이다.

일본인 저자가 쓴 이 책은 ‘스몰하우스’(Small House)에 대해 설명한다. 3평(약 10㎡) 정도의 작은 집에 거주하는 6명을 취재해 쓴 책이다. 물론 저자도 스몰하우스에 산다. 어느 산 깊숙이 버려진 듯한 아주 보잘 것 없는. 삽도로 실린 그의 집을 보면 누구나 ‘일본인들은 역시 참 괴짜군’이란 생각이 들 거다. 미국과 호주에 거주하는 그의 취재 대상들이 사는 집은 좀 다르다. 그것은 얼핏 보기엔 컨베이어 벨트에서 대량 생산한 주택처럼 엇비슷하게 깔끔하다. 주목할 것은 외관이 아니라 그 속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많은 이들이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무리가 없는 작은 집을 갖자”고. 책에 등장하는 사례에는 주택 융자에 치이다가 결국 작은 집을 갖게 됐다는 사람도 있다. 다른 부류도 있다. 도시에서 그럴 듯한 전문직을 갖고 있지만, 본인 나름의 철학으로 인해 일부러 작은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이들은 입을 모아 증언한다. 작은 집이 마음의 평안을 갖게 했노라고, 저자는 이를 ‘개인정신주의’라 부른다. 이어 스몰하우스 운동의 의의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작은 집에 살다보면 결국 환경에도 도움이 되는 효과를 발휘하는 예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라마르 알렉산더의 작은 집. 모두가 전원일기를 쓰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럴 것 같다.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이 늘어나면 이 땅에 그만큼 낭비는 줄어들 것이고, 지구는 좀 덜 아플 거다. 스몰하우스 운동의 의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가 물었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그가 내린 답은 스몰하우스 운동의 실행자들보다 가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톨스토이를 읽었을진대 세상은 ‘크기’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했다.

왜 그러냐고? 모르겠다. 아는 것은 이 책이 제시하는 스몰하우스 운동에 많은 한계와 난관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는 거다. 사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싱글 혹은 2인 커플이다. 자녀가 있을 경우에 적절한 스몰하우스의 모델은 보이지 않는다. 또 대부분의 작은 집이 한적한 시골에 자리잡았다. 스몰하우스의 도시적 모델은 언급되지 않는다. 과연 이 많은 인구가 너른 들판과 산골짜기 곳곳에 스몰하우스를 짓고 사는 것은 친환경적인가. 모두가 전원일기를 쓰고 있을 수는 없다.

저자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심지어 황당하기까지 한다. “식량을 비축해두기보다는 신선한 재료를 마켓에서 사다 먹는 게 더 좋다. 언제 입을지 모를 옷가지들을 상자에 넣어 쌓아두기보다는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 기분에 가장 잘 맞는 옷을 구입하는 게 낫다”, “식사는 얼마든 밖에서 할 수 있고, 세탁이 필요할 때는 동전 빨래방을 사용하면 된다. 공공도서관은 자기만의 거대한 서가가 된다” 등등. 그 고결한 ‘개인정신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나를 탓해야 하는 걸까.

 

니가 사는 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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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둘러싸고 전쟁이다. 한쪽에서는 당장이라도 동대문 상가 일대에 옛 명성과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프로젝트를 완성한 것처럼 홍보에 열을 올리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시작부터 잘못된 프로젝트’임을 강조하며 ‘비정상의 정상화’ 방안을 내놓으라고 난리다. 또 전쟁통에 원치 않은 아이라도 태어난 것처럼 씁쓸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잘 키워보자는 평화주의자들도 보인다. 하지만 전시엔 늘 그렇듯 평화주의자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짬을 내 DDP를 둘러봤다. 구석구석 돌아봤다. 과거 오세훈 시장이 내세웠던 ‘디자인 서울’에 100% 공감하진 않지만, 그래도 디자인의 가치를 중시하는 건축 전공자의 시각으로 살펴봤다. 솔직히 오 전 시장의 성급함에는 부정적이었지만, 어쨌든 우리 나라에 이런 조형의 건축 디자인을 시도했단 것만으로 난 점수를 주는 편이다.

물론, 세계적 건축가의 작품이지만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흐르는 듯한 공원과 외관 디자인은 내부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건 디자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에 있는 전시공간과 상업공간 등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문제점으로 드러난다. 이미 완결된 건물의 ‘하드웨어’를 뜯어낼 수는 없으니,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대로 이제 ‘소프트웨어’의 문제다.

DDP를 둘러싼 비판을 좀 더 소환해보자. 동대문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무시했다는 지적이 많다. 역사성... 이미 동대문은 운동장을 그리워하는 세대의 장소가 아니라는 지적으로 충분할 것 같다. 문제는 주변과 조화롭지 않다며 지역성을 거론하는 건데, 난 묻고 싶다. 대체 밀리오레, 두산타워, 헬로APM, 굿모닝시티 따위의 건물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라는 건가.

물론 건축 혹은 도시에서 조화나 맥락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형태, 질감, 표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DDP의 디자인은 조화롭다. 꽉 막히고 침침했던 동대문운동장과 그 운동장의 역사성에 다소 과도하게 집착했던 다른 건축가들의 설계안보다는 DDP가 ‘살아있는’ 편이다. 당신이 동대문 어디에서 DDP로 접근하든, 이 건물이 자신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있음을 금방 깨닫게 될 거다.

 

DDP야경@DDP공식홈페이지

누군가는 이런 지적을 했다. “DDP 같은 곡선형 디자인은 원래 공간 이용 효율이 낮다. DDP는 공간을 낭비적으로 쓰고 있다”라고. DDP를 방문한 날 나는 봤다. 굳이 이 곳에서 봄바람을 즐기는 사람들, 기묘한 건축물의 표면을 쓰다듬는 사람들, 뭔가 더 신기한 곳이 있을까하며 둘러보는 사람들. 이들 중 누가 ‘공간적 효율’을 요구한단 말인가. 효율을 강조하는 도시에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지쳤다.

DDP를 찾아간 날, 난 오히려 그 공간적 비효율이 이 곳의 핵심이라고 봤다. 그날 많은 사람들이 이 비효율적인 공간을 일부러 찾아왔음을 봤다. 이들은 딱히 목적도 없이 뭔가 이 땅 위에 펼쳐진 새로운 시도를 반기고 또 궁금해서 이 곳에 온 것 같았다. DDP는 그런 장소가 될 가능성이 높다. 딱히 볼 일 없이도 찾게 되는. 그런 인적 인프라를 가진 곳은 서울에 그리 많지 않다.

어쨌든 DDP는 지어졌다. 그리고 이 곳을 둘러본 날, 나는 평화주의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그것은 단순히 DDP가 이미 지어졌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나 역시 내가 관찰했던 사람들처럼 이 건축물에 빠져들었다고 고백해야겠다. 그 곳에 가면 딱히 볼 것도, 그닥 할 것도 없는 걸 알지만 자꾸만 가고 싶어진다. 나는 이 DDP가 뭔가를 우리에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와서 뭔가를 해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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