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처라는 명목으로 중앙대학교를 드나든 지 반년 정도 됐다. 12월 중순쯤 처음 중앙대를 찾았을 때 본 것은 총장실이 있는 본관 2층에 파업 중인 청소노동자 십여명이 자리를 펴고 담소를 나누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며칠 전엔 과거 학교에서 징계 처분을 받았던 한 학생이 학생회 선거에 출마하려 한 것을 학교 측이 막았다는 타 언론사의 보도를 봤다. 이런 단편들이 겹쳐 내겐 중앙대의 첫 인상이 됐다.
노영수란 사람을 알게 됐다. 워낙 유명하고 시끄러운(?) 일을 많이 만드는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일을 자주 벌이는 이유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사실 없었다. ‘대학의 기업화’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대학 한 두 곳의, 그리고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니까. <기업가의 방문>은 노영수가 기업화된 대학 중 중앙대가 유난히 시끄러운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03학번인 노영수는 지난 2월에야 학사 학위를 받았으니 졸업이 무지 늦었다. 등록금 때문에 저 멀리 남해에서 고기잡이배를 타야했을 정도로 그리 순탄치 않은 삶을 살던 그는, 자신이 다닌 독어독문학과의 교수였던 진중권이 재임용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인생이 한층 더 ‘꼬였다’. 그는 이 사태가 두산 재벌이 중앙대를 사실상 ‘인수’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봤다.
두산 혹은 중앙대는 ‘삐딱한’ 교수를 잘라내는 걸로 끝내지 않았다. 박용성 회장은 “자본주의는 어디서나 통한다”는 신념을 가진 분이다. 교수들은 S, A, B, C급으로 평가되고, 수준에 따라 성과급을 받게 됐다. 회계학이 누구나 들어야 하는 교양 필수수업이 됐다. 재단을 비판한 학내 언론은 전량 수거당하는 ‘찌라시’ 신세가 됐다. 외부 경영컨설팅 업체가 껴들어 학과들의 실적을 평가하는 기준을 만들어냈다.
노영수는 두산이 중앙대의 배후엔 선 뒤 일어난 이런 움직임에 항의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다행이 법정이 노영수의 손을 들어줬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어선까지 탔던 그는 가까스로 고졸 신세를 면했다. 이 과정에서 두산은 노영수란 개인의 행적을 사찰하기도 했다. 두산 혹은 중앙대가 학생들을 향해 ‘자본주의 몽둥이’를 휘두르는 맞은편에는 늘 그가 있었다.
졸업한 노영수는 지난달 다시 학교를 찾았다. 자신과 함께 시위를 벌여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은 적 있는 한 4학년 학생의 성적장학금을 학교가 ‘박탈’한 데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대체 두산 혹은 중앙대가 써내려가는 ‘잔혹사’의 끝은 어디일까. 앞으로도 왠지 노영수를 자주 보게될 것 같다. 그가 이미 오래 전에 ‘방문’한 ‘기업가’에 대한 회고록을 이제 펴내도 전혀 늦은 감이 없다.
난 어쩐지 두산베어스엔 정이 안 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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