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대로 읽기'에 해당되는 글 6건

  1. 총, 균, 색(色)
  2. 너구리 한 봉에 다시마 두 장 (1)
  3. 내릴 수 없는 이상한 배, 대한민국 (2)
  4. '머리끄덩이'를 붙잡는 집단기억
  5. 어느 기업 대학 잔혹사
  6. 수렵채집으로 돌아가라?

총, 균, 색(色)

 

왜 인간은 아무 때나 섹스를 하는 걸까?

 

“아, 왜긴 왜여! 좋으니까 하는 거지!”

 

매해 서울대 도서관 대출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책, <총, 균, 쇠>의 저자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섹스’를 논한다. (물론 그도 하고 살겠지) 제목은 <섹스의 진화>. 서점에서 눈에 띄면 집어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단어가 제목을 장식한다. 이 책에서 다이아몬드가 던지는 질문들은 대략 이런 식이다.

 

왜 섹스는 즐거운가? (즐겁지 않을 때도 있긴 있을 거다)
왜 인간은 남 몰래 섹스를 할까? (그럼 공개적으로 하란 말인가…)
왜 인간 여성은 폐경을 맞이할까? (이건 좀 질문 같은 질문이군)
왜 인간 남성의 성기는 큰 것일까? (그래? 고릴라군, 보고 있나)

 

 

정말 어려워 보이는 ‘폐경’ 얘기만 빼고 나머지 3가지 질문으로 비과학적인 ‘썰’을 풀라고 하면 밤새 떠들 수 있겠지만(이른바 ‘음담패설'), 우리의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진지하다. 왜냐면, 위의 질문이 담은 성적 습성들은 인간만이 지닌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독특한’ 성적 습성이 커다란 뇌나 직립 보행 만큼이나 인간의 진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게 다이아몬드의 주장이다.

 

아… 정말 학자들은 참… 간단한 문제를 어렵게 만든다. 다음과 같은 이 책의 머리말을 읽는 순간 책을 덮어야 했음을 깨닫는다.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서 성행위를 더욱 즐겁게 만들어 줄 새로운 체위를 배울 수도 없고…” 휴, 그래도 다이아몬드께서 쓰셨으니 꾹 참고 읽어봤다.

 

다이아몬드는 인간의 성생활을 탐구하기에 앞서 우리의 ‘종 차별적 시선’을 제거하라고 한다. 우리 인간은 보통 연애 혹은 결혼을 통해 한 파트너와 길게는 수십년 동안 잠자리를 갖는 것을 정상으로 취급하지 않나. 하지만 호랑이와 오랑우탄의 성생활은 오로지 ‘원 나이트 스탠드(One Night Stand)’로 점철돼 있다는 사실.

 

“오랑우탄은 멍청하니까 그렇지!”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이해 못 하듯, 우리 인간의 성생활도 호랑이나 오랑우탄의 세계에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물개가 펭귄을 강간한다는 동물의 성생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생활도 규명 대상이다. 대체 우리는 왜 일부일처제를 받아들였나?(번역: 대체 우리는 왜 한 사람하고만 하고 살게 됐나?)

 

종 차별적 시선을 거두고 보니, 갑자기 비비(원숭이의 한 종류)가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인간 신혼부부를 보며 비웃는다. 이 신혼부부는 배란기를 정확히 알고 의식을 치르기 위해 준비 중인데 말이다. 비비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들의 암컷의 성기 주변의 피부가 부풀어 오르고 선홍색으로 변하는 등 징조로 배란기를 쉽게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동물들이 이처럼 배란기를 쉽게 알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그래서 그들은 딱 그즈음만 섹스를 한다. 반면 배란기를 모르는 인간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한다. 전지적 비비 시점으로 보면 인간들은 얼마나 낭비적이고 피곤한 종인가.

 

혹은 너무 밝히는 종은 아닌가

 

비비 따위에게 무시 당하니 기분도 나쁘고, 한번도 생각 해보지 않은 주제를 갑자기 생각하려니 머리도 아프다. 왜 인간이 배란기가 아닌 때에도 섹스를 하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설이 있다.

 

아무튼 다이아몬드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의 먼 조상은 지금과 달리 상대를 바꾸어 가며, 다만 오직 배란이 이뤄지는 시기에만 섹스를 했다. 하지만 지금의 인간은 기본적으로 종족 보전에 유리하다는 이유에서, 일부일처제적 관계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섹스를 하도록 바뀌었다. (중간의 복잡한 연결고리는 책을 직접 읽으소서…)

 

하지만 이 책에서 제기된 인간의 성적 습성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다이아몬드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는 않는다. 이 책의 끝에서 다이아몬드는 ‘인간의 성적 습성을 탐구하는 것은 인간의 음경이 가진 진화론적 문제와 같다’고 실토한다. 귀가 '번쩍' 하는 이 말은 대체 무슨 말일까. 우리의 음경은,

친족인 유인원에 비해 3~4배 가량 과장된 길이의 그것. 남자는 그토록 집착한다지만 여자는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것. 섹스를 할 때도 굳이 길이가 이 정도일 이유는 없는 그것. 지난 700만~900만년 동안 살았던 우리 인간 조상들의 추정되는 그것의 길이보다 무려 4배나 늘어났다는 그것.

 

이렇게 진화론적 의문으로 가득한 그것이 바로 과연 인간의 성적 습성에 대한 탐구가 처한 맥락과 같다는 말이다. 음, 살다살다 이런 명쾌한 비유를 어디에서 또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실상은 매일 밤 방바닥만 긁고 있는 나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그런 행운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마가 두 장 들어있는 너구리 라면이라니. 오동통 면을 후루룩한 다음 빨간 국물을 들이키기 전 집어먹곤 하는 그 다시마가 두 장이라는 건 꽤 기발한 상상이었다. 물론 그러지 말란 법도 없지만 그래도 너구리 한 봉에 다시마 두 장을 먹었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건 말이 안 된다고 봤다. 술자리 농담으론 꽤 괜찮지만, 대기업 농심을 바보로 아나......

하지만 너구리 한 봉에 다시마 두 장은 충분히 가능했다. 왜냐면, 사정은 대략 이러하다. 너구리 라면 공장 컨베이어벨트가 달린다. 동그란 모양의 꼬불꼬불 면발 덩어리가 그 위에 줄을 선다. 벨트 끝에서 이 덩어리는 떨어져 새빨간 포장지 속으로 쏙 들어가겠지. 그 전에 아마 어느 지점에선가 스프 한 봉, 다시마 한 장이 면발 위로 툭 떨어져 나란히 포장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흰 머릿수건을 쓴 노동자가 다시마를 일일이 손으로 쪼개 넣는다. 이런, 믿기 힘든 전근대적인 광경.

‘너구리 한 봉, 다시마 한 장’의 믿음은 현대 자본주의 대량생산 체제를 너무 과신한 데서 비롯됐다. 기계화 역시 흰 머릿수건 아줌마(그냥 떠오르는 성차별적 이미지를 그대로 갖다 쓴다)를 대체할 수 없다고 농심은 설명한다. 이 아줌마의 실수가 ‘너구리 한 봉, 다시마 두 장’을 만들어낸다. 이건 불량품이다. 다만 불량품인데, 소비자는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은 불량품이다. 어떤 소비자는 이 불량품을 '로또'라 부른다. 이 불량품의 피해자는 소비자가 아니다. 대기업 농심이 손해를 본다. 그 조그만 다시마 한 장 가격이 얼마나 되겠느냐만.

음, 그리고보면 이 기분 좋은 불량품을 계속, 또 자주 보기 위해선 ‘노동의 종말’ 따윈 없어야 할 텐데. 허나 언젠가 리프킨의 예언은 실행될테고, 우리의 다시마엔 보다 평등한 날이 오겠지. ‘너구리 한 봉, 다시마 두 장’ 같은 소소한 즐거움이 사라지는 게 진보라면, 나는 진보를 거부할 것인가. 겨우 다시마 두 장 따위에 '사람 사는 세상' 같은 구호가 곁들여 있었단 말인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라는 진부한 말이 하고 싶어진다. 아직 그런 공장이 있다.

...... 나의 비좁은 자취방 찬장엔 너구리 네 마리. 오늘따라 흰 머릿수건 아줌마가 손짓하네, 너구리 한 마리 몰고 가세요.

 

>>> 아래는 한겨레출판 보도자료

 

이 책은 제지 공장부터 콘돔, 간장, 가방, 도자기, 엘피, 맥주, 그리고 김중혁 글 공장까지 호기심이 가득한 소설가 김중혁이 다양한 공장들을 다니면서 적어 내려간 시간과 기억, 속도와 사람에 대한, 느긋하고 수다스러운 글과 그림을 엮은 산문집이다. 15개의 공장 산책기와 더불어 노트 탐험기, 번뜩이는 가방 디자인 하기, 맥주 만취 시음기 등 작가의 재기 넘치는 토크(talk)와 인공 눈물, 글로벌 작가, 안경, 보온병, 시간표 등 사물을 담은 그림 등도 엿볼 수 있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이 공장에서 어떻게 생산되는지 훔쳐보고 싶은 마음에, 물건을 만든 장소에 가서 만드는 모습을 보면 물건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공장 산책기를 시작했다고 밝힌다. 소리와 도시, 기기 같은 사물들을 아날로그 감성과 함께 깊이 있게 만들어내는 그의 글들이 어떤 기계의 발명과 비슷해 보이기에 ‘발명가’라는 별명이 붙기도 한 김중혁. 그는 실제로 공장을 다니면서 공장에는 사람이 있고,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이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가 생각하는 공장의 모습은 훨씬 더 입체적이고 복잡할 것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소설가 김중혁은 고민한다. “왜 나는 손에 잡히는 무엇인가를 누군가에게 줄 수 없는 것일까. 외투를 만들거나 가방을 만들어서 직접적으로 제공할 수 없는 걸까.” 그는 소설가가 되고 난 후에도 그런 고민을 자주 했다. “내 소설은 어떤 ‘물건’이고, 어떤 ‘제품’일까. 나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리고 엄청난 소음으로 꽉 차 있고, 묘한 냄새가 떠다니며, 기계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공장이, 만들어지고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지고 있는 공장이 부러웠던 때가 있었다. 소음이 리드미컬하게 들리고, 화약약품이 향기롭게 느껴질 만큼.

지금은 나름대로 답이 생겨 소설이 어째서 필요한지, 글이 왜 중요한지도 어렴풋하게 알 것 같다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비슷하게 살아가고, 연결되고, 서로가 서로를 돕고, 서로의 부분을 생산하고,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조립품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지구라는 거대한 공장에서 서로를 조립하고 있는 중이라고.

 

 

제8호 태풍 '너구리' 북상, 농작물 피해 당부

 

언제나처럼 스크롤을 내리며 뉴스를 읽는데 '데자뷰'마냥 야릇한 느낌을 받은 날이 있었다. 여야가 세월호 국정감사 증인 출석을 두고 어떤 분을 불러야 하느니 마느니 싸우다가 헤어졌다는 뉴스를 볼 때였다. 순간 이게 오늘 나온 뉴스가 맞나 싶은 의문이 머리 속으로 스쳐 들어갔다. 그래서 네이버에 그 분의 이름과 '파행'이란 두 글자를 나란히 넣어 검색해 봤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에도 여야는 그 분의 증인 소환 문제를 두고 싸우다 결론 없이 헤어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뉴스가 날짜만 달리하며 반복된다. 내가 뉴스(NEW-S)의 철자를 잘못 아는 건 아닐까.

유가족들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 중이다. 곳곳에서 "잊지 말자"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건 분명 누군가는 잊어가고 있거나 벌써 잊었기 때문이다. 종편 채널에 자주 등장하는 모 교수가 "세월호 얘기를 하면 시청률이 안 나온다. 국민들은 이제 관심이 없다"고 말했던 통화 내용이 떠오른다. 해경을 해체하고, 유병언을 '죽은 채'로 잡고, 대통령이 휴가를 가고, 재보선이 지나니 이제 정말 끝인가 싶다. 누군가 "세월호는 이제 끝났다. 잊어라"라고 말해도 반박하기가 괜히 엄한 분위기다.

시국이 이러니 이 책이 인기가 없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경제학자 우석훈의 <내릴 수 없는 배>. '세월호로 드러난 부끄러운 대한민국을 말하다'라며 세월호 참사 100일쯤 이미 나왔지만 언론을 별로 타지도 않았다. 세월호 이전의 '일상'이란 게 그닥 편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모두 소중한 그 '일상'을 찾아가려는 마당에 우석훈은 말한다. "세월호를 계기로 우리는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더 위험해질 것이다" 그 놈의 일상으로 돌아가려는데 별안간 우석훈이 훼방을 놓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전개된 일련의 상황에 대한 우석훈의 해석에서는 대한민국에 대한 자비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사람들이 슬픔과 패닉에 빠져 있는 상황을 악용한 것"이라고 볼만한 일들이 이미 벌어졌거나,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또 그게 현대 자본주의의 기본 방향이라는 거다. 이른바 '재난 자본주의'다. 우석훈이 예로 들었듯 제임스 딘이 나온 영화 <에덴의 동쪽>에서 주인공이 2차 세계대전이란 대재난을 앞두고 곡물 가격 상승을 예측해 콩을 매점매석한 행위 따위를 말한다. 이걸 대한민국에서도 세월호 참사 이후 누군가 하고 있다는 거다.

일단 청와대. 정부가 총리실 산하로 국가안전처를 따로 신설하겠다고 한 발상을 우석훈은 "대통령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면피용 시스템"이라고 평가절하한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관리 시스템은 그야말로 '아노미'라고 말한다. 해경은 공중분해될 운명이고 새로 생긴 시스템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만 참사에 대한 법적·행정적 1차 책임을 절대로 지지 않게 됐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럼 세월호 참사는 기본적으로 배 사고니까, 이제 배는 좀 달라지려나? 우석훈은 절레절레. 일단 대통령도 앞으로 배를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를 일절 안 했다는 거다. 이제 연안여객 사업이 어려워질 것은 불보듯 뻔한데 정부는 청해진해운 재산을 몰수해 보상금을 채워넣기 위한 '단 하나의 노력'만 할 뿐이다. 배의 수명을 연장해 주고 운항 관리를 느슨하게 해온 점이 세월호 참사의 주원인으로 꼽히는데 정부는 말이 없다. 우석훈은 배가 더 위험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은 '내릴 수 없는 배'이다. 4월 16일 오전 8시52분, "살려주세요"란 단원고 학생의 신고를 목포해경과 전남소방본부가 '뺑뺑이' 돌렸듯, 대한민국은 세월호 참사 100일이 훌쩍 넘도록 국민의 안전에 대한 논의를 무한 뺑뺑이 돌리고 있다. 우린 반복되는 세월호 특별법 뉴스처럼 분명 또 데자뷰를 겪을 것이다. 그러고는 "대한민국이 원래 이렇지, 뭐"라며 똑같은 대사를 반복할 터. 내릴 수 없는 배를 탔다. 세월호를 탄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야 그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책은 얇다. 그래도 우석훈이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서부터 앞으로 진행될 사회적 논의의 주제들까지 정리를 잘한 것 같다. 썩 만족스럽진 않지만 소설 <모피아> 이후 자꾸 문학적인 욕심을 내는 우석훈의 노력 때문에 읽기에도 어렵지 않다. 그러니 출퇴근길에서만이라도 이 책을 많은 사람이 한번쯤은 들었으면 좋겠다. 가슴이 자꾸 세월호를 잊으라고 하면 일단 머리로라도 읽어야 하지 않나 싶다. "정말 '잊히는 것'이 너무나 애달픈 이 영혼들을 기억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차원에서라도 말이다.

 

제발 좀 내렸으면 하는 놈들은 절대 내리지 않는다

 

2012년 5월 열린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한 여성이 조준호 당시 통진당 대표(현 정의당 공동대표)의 ‘머리끄덩이’를 움켜잡았다. 이 장면은 모자이크 없이 언론에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머리끄덩이녀’가 포털사이트 검색 순위에 올랐다. 이 여성을 비롯해 당시 ‘폭력 사태’를 일으킨 이들은 ‘NL’ 혹은 ‘종북’이라 불렸다. 그리고 한편에선 ‘경기동부연합’이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2013년 8월 ‘RO 내란음모’ 사건이 불거졌다. 다시 경기동부연합이 소환됐다. 현직 국회의원 등 사건의 몇몇 중심인물들이 다닌 한국외대 용인캠퍼스가 지목됐다. 본교가 아닌 지방분교를 다닌 이들의 자격지심 때문이라거나, 과거 용인의 격렬한 노동운동 영향 때문이라는 등 이야기가 떠돌았다.

경기동부연합의 뿌리를 추적한 책 <경기 동부>를 쓴 임미리는 조금 다르게 봤다. 용인이 아닌 성남에 주목했다. 내란음모 사건의 당사자 중 누구누구는 성남의 한 고등학교 선후배 관계라는 점 등 대부분이 성남과 어떻게든 연관이 있다는 거다. 그러면서 저자는 1971년 8월 10일, 현재 성남의 뿌리인 ‘광주대단지’에서 벌어진 봉기를 불러낸다.

“배가 고파 산모가 아기를 삶아먹었다” 1960년대 후반 서울시의 도시 계획에 따라 도심 철거민 12만명이 이주해 자리 잡은 광주대단지는 이런 소문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수도·전기 등 기반시설 부족, 일자리 부족, 당연히 사람들 먹을 것도 부족해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배를 채우던 곳. 봉기가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그래서 그들은 “민생고 해결” 등 구호를 내걸고 봉기를 일으켰다. 대략 3만~6만명이 참가한 이 봉기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최초의 봉기로 알려졌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잘 모른다.

 

1971년 8월 10일 박정희 정권에서의 최초 봉기가 오늘날 성남의 전신인 광주대단지에서 일어났다

‘8·10 광주대단지 사건’의 역사적 소외는 곧 이 곳에 사는 주민들에 대한 소외였고, 나아가 이 지역 자체에 대한 소외였다. 이 도시에는 ‘폭도’ ‘빈곤’ ‘범죄’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집단이 기억을 만들 듯 기억이 집단을 만든다’(63쪽) 소외된 집단은 ‘소외’ 자체를 자신들의 기억으로 만들었고, 이 기억이 성남을 ‘저항의 도시’로 만들었다. 1980년대, 이 도시 출신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서도 모임을 꾸렸다. 저항의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은 ‘운동권’ 일원으로서 저항을 표출했다. 그리고 다시 고향인 성남으로 돌아와 활동을 이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데 왜 PD가 아니라 NL일까? 저자는 주체사상을 이념으로 해 민족과 반민족 사이에 전선을 긋는 NL이 PD에 비해 집단기억에 귀속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분석한다. 또 1980년 ‘5월 광주’에서 제기된 미국 책임론도 ‘주체사상파’가 성남 청년운동의 주류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지역과 민족의 구체적인 집단기억을 받아들인 성남의 NL, 경기동부연합은 이렇게 형성됐다. 이후 그들은 지역 운동과 통일 운동을 거쳐 정당 활동에까지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들이 민주주의 정치의 공식화된 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특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광주대단지 사건에서 비롯된 차별과 배제의 고착화된 집단기억을 가진 경기동부연합에겐 그 무엇보다 ‘진영 논리’가 중요했다. 또 5월 광주 대학살을 저지른 무지막지한 조국에 맞서기 위해 받아들인 북한의 주체사상이 이들의 비민주적 성격, 즉 ‘폐쇄적 패권주의’를 형성했다.

그 특성이 마침내 통진당 비례대표 부정선거 사태에서 대중 앞에 공개됐다. 정치적 책임보다는 “당원들의 명예”를 강조한 것, “국민들의 눈높이를 당원의 눈높이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발언, 그리고 마침내 ‘머리끄덩이녀’로 대표되는 폭력 사태는 여전히 고착화된 집단기억에서 비롯된 ‘자기 보존 의식’과 ‘닥치고 단결’식의 비민주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바로 집단의 덫에 빠져버린 것이다’(233쪽) 경기동부연합은 그렇게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었다.

여론의 ‘종북몰이’가 거센 데다 내란음모 사건은 최종 판결이 나기 전에 이미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강하지만, 경기동부연합은 여전히 단호하게 맞서는 중이다. '외부의 억압' 앞에서 이들의 굳건한 자기 보존 의식과 단결력은 지칠 줄 모른다. 물론 지금은 어느 정도 고립을 극복하고, 대부분 진보 세력과 시민사회 진영이 이들과 다시 연대하고 있는 분위기다. 임미리는 이 단결력에서 번질 수도 있는 들불을 염려하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대중에게도 경기동부연합의 집단기억처럼 '머리끄덩이녀'의 기억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 거다. 더구나 언론에 공개된 ‘RO 녹취록’에서 드러난 이들의 ‘혁명적 정세 인식’은 그냥 한 개인의 생각이라며 넘어가긴 어려울 정도로 지나치게 결연했다. 또 이들을 과도한 상상에 둘러싸인 집단으로 여기게끔 했다. 경기동부연합에 우선 절실한 것은 외부의 적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대중과 한참 괴리된 현실 인식을 깨닫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들의 집단기억과의 투쟁이 아닐까. ‘광주대단지 키드’들은 오히려 그들만의 집단기억에 안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남종합시장에서 짝퉁 신발을 사던 때가 생각나네

 

출입처라는 명목으로 중앙대학교를 드나든 지 반년 정도 됐다. 12월 중순쯤 처음 중앙대를 찾았을 때 본 것은 총장실이 있는 본관 2층에 파업 중인 청소노동자 십여명이 자리를 펴고 담소를 나누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며칠 전엔 과거 학교에서 징계 처분을 받았던 한 학생이 학생회 선거에 출마하려 한 것을 학교 측이 막았다는 타 언론사의 보도를 봤다. 이런 단편들이 겹쳐 내겐 중앙대의 첫 인상이 됐다.

노영수란 사람을 알게 됐다. 워낙 유명하고 시끄러운(?) 일을 많이 만드는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일을 자주 벌이는 이유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사실 없었다. ‘대학의 기업화’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대학 한 두 곳의, 그리고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니까. <기업가의 방문>은 노영수가 기업화된 대학 중 중앙대가 유난히 시끄러운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03학번인 노영수는 지난 2월에야 학사 학위를 받았으니 졸업이 무지 늦었다. 등록금 때문에 저 멀리 남해에서 고기잡이배를 타야했을 정도로 그리 순탄치 않은 삶을 살던 그는, 자신이 다닌 독어독문학과의 교수였던 진중권이 재임용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인생이 한층 더 ‘꼬였다’. 그는 이 사태가 두산 재벌이 중앙대를 사실상 ‘인수’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봤다.

두산 혹은 중앙대는 ‘삐딱한’ 교수를 잘라내는 걸로 끝내지 않았다. 박용성 회장은 “자본주의는 어디서나 통한다”는 신념을 가진 분이다. 교수들은 S, A, B, C급으로 평가되고, 수준에 따라 성과급을 받게 됐다. 회계학이 누구나 들어야 하는 교양 필수수업이 됐다. 재단을 비판한 학내 언론은 전량 수거당하는 ‘찌라시’ 신세가 됐다. 외부 경영컨설팅 업체가 껴들어 학과들의 실적을 평가하는 기준을 만들어냈다.

노영수는 두산이 중앙대의 배후엔 선 뒤 일어난 이런 움직임에 항의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다행이 법정이 노영수의 손을 들어줬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어선까지 탔던 그는 가까스로 고졸 신세를 면했다. 이 과정에서 두산은 노영수란 개인의 행적을 사찰하기도 했다. 두산 혹은 중앙대가 학생들을 향해 ‘자본주의 몽둥이’를 휘두르는 맞은편에는 늘 그가 있었다.

졸업한 노영수는 지난달 다시 학교를 찾았다. 자신과 함께 시위를 벌여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은 적 있는 한 4학년 학생의 성적장학금을 학교가 ‘박탈’한 데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대체 두산 혹은 중앙대가 써내려가는 ‘잔혹사’의 끝은 어디일까. 앞으로도 왠지 노영수를 자주 보게될 것 같다. 그가 이미 오래 전에 ‘방문’한 ‘기업가’에 대한 회고록을 이제 펴내도 전혀 늦은 감이 없다.

 

난 어쩐지 두산베어스엔 정이 안 가더라

 

지구에 한 해 평균 2000개의 새로운 화학물질이 생겨난다. 대략 계산하면 하루 5~6개가 나타나는 셈이다. 어떤 사람도 2000개 전부에 노출되지는 않겠지만, 누군가는 그 중 한 두 개쯤에 노출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을 만큼 많은 수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주인공처럼 어떤 화학물질에 노출돼 백혈병에 걸리는 불운만은 없기를 바라야 할 것 같다. 하지만 2000개 덕에 진보하는 인류의 눈부신 문명은 그런 불운에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다.

기왕 영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정말 반도체 공장 같은 곳에서 이름도 낯선 화학물질에 노출되는 것과 질병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을까. 서울대 의과대학 홍윤철 교수가 쓴 <질병의 탄생>에는 이미 240여년 전에 비슷한 주장이 있었음이 나온다. 1775년 영국의 한 의사는 석탄을 태우고 남는 검댕으로 가득찬 굴뚝을 청소하는 어린 노동자들에게서 음낭암이 많이 발생한다고 보고했다. 여기에 '인류가 이전에는 전혀 노출된 적이 없었던 물질이어서 자연선택에 의한 유전자적 적응 과정을 겪지 않았다'는 설명을 곁들이면 좀 그럴싸한가.

산업혁명 초기 굴뚝 청소 노동을 했던 아이들에게서 음낭암이 많이 발생한다고 보고됐다

인류의 역사는 수백만년, 인류의 눈부신 문명화 역사는 농업혁명까지 포함해 후하게 쳐봐야 1만여년,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를 일으킨 산업혁명의 역사는 불과 200여년이다. 저자는 과거 인류의 조상으로부터 현생 인류가 나타나기까지 진화를 거듭한 수백만년에 비해 농업혁명부터 시작된 문명화 이후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겪은 기간은 매우 짧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이 몸이 문명화 이후 급격히 달라진 식생활·자연환경·생활습관 등에 적응할 만큼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상태라는 거다. 그래서 어떤 질병은 우리를 위협한다.

농업혁명 이후 ‘고작’ 1만년 동안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다. 수렵채집을 하면서 드물게, 또 오히려 다양하게 섭취하던 식단이 곡류를 중심으로 단순해졌다. 가축을 기르게 되면서부터는 동물과 공생하던 세균이 사람과 만나게 됐다. 잉여 작물이 생겨나면서 부족끼리 서로 정복하며 이동하기도 했고, 많은 잉여 작물을 가진 집단의 최상층에게는 이미 비만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집단화·정착화하기 시작한 인류의 삶의 양식은 콜레라·페스트 같은 전염병이 급속도로 퍼지기에 아주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냈다.

산업혁명은 질병 탄생에 있어 더 직접적이다. 화학비료와 기계화가 불러온 작물의 대량 생산으로 풍요로워진 식탁은 당뇨환자를 늘게 했다. 영양 섭취는 늘게된 반면 활동량은 줄었다. 생산기술의 자동화와 사무직 노동자의 증가는 비만의 증가를 불러왔다. 전기를 사용해 밤을 밝히게 되면서 우리의 수면 시간은 줄어들었다. 온갖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담배와 술도 마찬가지다. 담배의 역사를 아무리 길게 잡아도 인간의 유전자는 담배에 포함된 니코틴 등 화학물질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조상에게 냉장 기술이 없었던 탓에 발효된 과일에서 오랜 시간 알코올을 섭취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렇게 다량의 알코올을 생산해 마신 것은 그 역사가 짧다.

그럼 이제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유전자에게 질병의 책임을 씌우면 될까. 그건 불합리하다. 유전자를 단 시간에 진화시키는 일은 성서의 창세기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도 이것이 활성화되지 않으면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 암이 그런 경우다. 고혈압의 경우엔 심지어 이를 유발하는 특정 유전자를 지목하지 못한 상태다. 따라서 개개 유전자의 코드나 유전자 작동 방식의 느린 변화가 아니라, 너무 빠른 환경의 변화에서 책임을 찾는 것이 낫다. 환경과 인간의 몸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하나의 계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문명을 만들었고, 문명은 질병을 만들었고,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낸 질병 때문에 죽는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팔자를 저자는 이렇게 풀어볼 것을 권한다: 현대 인류의 환경과 생활습관을 우리의 유전자가 최적으로 적응했던, 수렵채집 시기나 산업혁명 이전으로 돌리려 노력하라고. 어제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야근한 뒤 스트레스를 푼답시고 삼겹살과 소주, 흰쌀밥과 조미료 맛나는 된장국을 실컷 먹고 담배 한 대로 입가심한 그대에겐 매우 가혹한 일이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