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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렵채집으로 돌아가라?

 

지구에 한 해 평균 2000개의 새로운 화학물질이 생겨난다. 대략 계산하면 하루 5~6개가 나타나는 셈이다. 어떤 사람도 2000개 전부에 노출되지는 않겠지만, 누군가는 그 중 한 두 개쯤에 노출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을 만큼 많은 수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주인공처럼 어떤 화학물질에 노출돼 백혈병에 걸리는 불운만은 없기를 바라야 할 것 같다. 하지만 2000개 덕에 진보하는 인류의 눈부신 문명은 그런 불운에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다.

기왕 영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정말 반도체 공장 같은 곳에서 이름도 낯선 화학물질에 노출되는 것과 질병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을까. 서울대 의과대학 홍윤철 교수가 쓴 <질병의 탄생>에는 이미 240여년 전에 비슷한 주장이 있었음이 나온다. 1775년 영국의 한 의사는 석탄을 태우고 남는 검댕으로 가득찬 굴뚝을 청소하는 어린 노동자들에게서 음낭암이 많이 발생한다고 보고했다. 여기에 '인류가 이전에는 전혀 노출된 적이 없었던 물질이어서 자연선택에 의한 유전자적 적응 과정을 겪지 않았다'는 설명을 곁들이면 좀 그럴싸한가.

산업혁명 초기 굴뚝 청소 노동을 했던 아이들에게서 음낭암이 많이 발생한다고 보고됐다

인류의 역사는 수백만년, 인류의 눈부신 문명화 역사는 농업혁명까지 포함해 후하게 쳐봐야 1만여년,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를 일으킨 산업혁명의 역사는 불과 200여년이다. 저자는 과거 인류의 조상으로부터 현생 인류가 나타나기까지 진화를 거듭한 수백만년에 비해 농업혁명부터 시작된 문명화 이후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겪은 기간은 매우 짧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이 몸이 문명화 이후 급격히 달라진 식생활·자연환경·생활습관 등에 적응할 만큼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상태라는 거다. 그래서 어떤 질병은 우리를 위협한다.

농업혁명 이후 ‘고작’ 1만년 동안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다. 수렵채집을 하면서 드물게, 또 오히려 다양하게 섭취하던 식단이 곡류를 중심으로 단순해졌다. 가축을 기르게 되면서부터는 동물과 공생하던 세균이 사람과 만나게 됐다. 잉여 작물이 생겨나면서 부족끼리 서로 정복하며 이동하기도 했고, 많은 잉여 작물을 가진 집단의 최상층에게는 이미 비만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집단화·정착화하기 시작한 인류의 삶의 양식은 콜레라·페스트 같은 전염병이 급속도로 퍼지기에 아주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냈다.

산업혁명은 질병 탄생에 있어 더 직접적이다. 화학비료와 기계화가 불러온 작물의 대량 생산으로 풍요로워진 식탁은 당뇨환자를 늘게 했다. 영양 섭취는 늘게된 반면 활동량은 줄었다. 생산기술의 자동화와 사무직 노동자의 증가는 비만의 증가를 불러왔다. 전기를 사용해 밤을 밝히게 되면서 우리의 수면 시간은 줄어들었다. 온갖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담배와 술도 마찬가지다. 담배의 역사를 아무리 길게 잡아도 인간의 유전자는 담배에 포함된 니코틴 등 화학물질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조상에게 냉장 기술이 없었던 탓에 발효된 과일에서 오랜 시간 알코올을 섭취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렇게 다량의 알코올을 생산해 마신 것은 그 역사가 짧다.

그럼 이제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유전자에게 질병의 책임을 씌우면 될까. 그건 불합리하다. 유전자를 단 시간에 진화시키는 일은 성서의 창세기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도 이것이 활성화되지 않으면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 암이 그런 경우다. 고혈압의 경우엔 심지어 이를 유발하는 특정 유전자를 지목하지 못한 상태다. 따라서 개개 유전자의 코드나 유전자 작동 방식의 느린 변화가 아니라, 너무 빠른 환경의 변화에서 책임을 찾는 것이 낫다. 환경과 인간의 몸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하나의 계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문명을 만들었고, 문명은 질병을 만들었고,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낸 질병 때문에 죽는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팔자를 저자는 이렇게 풀어볼 것을 권한다: 현대 인류의 환경과 생활습관을 우리의 유전자가 최적으로 적응했던, 수렵채집 시기나 산업혁명 이전으로 돌리려 노력하라고. 어제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야근한 뒤 스트레스를 푼답시고 삼겹살과 소주, 흰쌀밥과 조미료 맛나는 된장국을 실컷 먹고 담배 한 대로 입가심한 그대에겐 매우 가혹한 일이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