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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리끄덩이'를 붙잡는 집단기억

 

2012년 5월 열린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한 여성이 조준호 당시 통진당 대표(현 정의당 공동대표)의 ‘머리끄덩이’를 움켜잡았다. 이 장면은 모자이크 없이 언론에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머리끄덩이녀’가 포털사이트 검색 순위에 올랐다. 이 여성을 비롯해 당시 ‘폭력 사태’를 일으킨 이들은 ‘NL’ 혹은 ‘종북’이라 불렸다. 그리고 한편에선 ‘경기동부연합’이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2013년 8월 ‘RO 내란음모’ 사건이 불거졌다. 다시 경기동부연합이 소환됐다. 현직 국회의원 등 사건의 몇몇 중심인물들이 다닌 한국외대 용인캠퍼스가 지목됐다. 본교가 아닌 지방분교를 다닌 이들의 자격지심 때문이라거나, 과거 용인의 격렬한 노동운동 영향 때문이라는 등 이야기가 떠돌았다.

경기동부연합의 뿌리를 추적한 책 <경기 동부>를 쓴 임미리는 조금 다르게 봤다. 용인이 아닌 성남에 주목했다. 내란음모 사건의 당사자 중 누구누구는 성남의 한 고등학교 선후배 관계라는 점 등 대부분이 성남과 어떻게든 연관이 있다는 거다. 그러면서 저자는 1971년 8월 10일, 현재 성남의 뿌리인 ‘광주대단지’에서 벌어진 봉기를 불러낸다.

“배가 고파 산모가 아기를 삶아먹었다” 1960년대 후반 서울시의 도시 계획에 따라 도심 철거민 12만명이 이주해 자리 잡은 광주대단지는 이런 소문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수도·전기 등 기반시설 부족, 일자리 부족, 당연히 사람들 먹을 것도 부족해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배를 채우던 곳. 봉기가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그래서 그들은 “민생고 해결” 등 구호를 내걸고 봉기를 일으켰다. 대략 3만~6만명이 참가한 이 봉기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최초의 봉기로 알려졌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잘 모른다.

 

1971년 8월 10일 박정희 정권에서의 최초 봉기가 오늘날 성남의 전신인 광주대단지에서 일어났다

‘8·10 광주대단지 사건’의 역사적 소외는 곧 이 곳에 사는 주민들에 대한 소외였고, 나아가 이 지역 자체에 대한 소외였다. 이 도시에는 ‘폭도’ ‘빈곤’ ‘범죄’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집단이 기억을 만들 듯 기억이 집단을 만든다’(63쪽) 소외된 집단은 ‘소외’ 자체를 자신들의 기억으로 만들었고, 이 기억이 성남을 ‘저항의 도시’로 만들었다. 1980년대, 이 도시 출신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서도 모임을 꾸렸다. 저항의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은 ‘운동권’ 일원으로서 저항을 표출했다. 그리고 다시 고향인 성남으로 돌아와 활동을 이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데 왜 PD가 아니라 NL일까? 저자는 주체사상을 이념으로 해 민족과 반민족 사이에 전선을 긋는 NL이 PD에 비해 집단기억에 귀속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분석한다. 또 1980년 ‘5월 광주’에서 제기된 미국 책임론도 ‘주체사상파’가 성남 청년운동의 주류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지역과 민족의 구체적인 집단기억을 받아들인 성남의 NL, 경기동부연합은 이렇게 형성됐다. 이후 그들은 지역 운동과 통일 운동을 거쳐 정당 활동에까지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들이 민주주의 정치의 공식화된 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특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광주대단지 사건에서 비롯된 차별과 배제의 고착화된 집단기억을 가진 경기동부연합에겐 그 무엇보다 ‘진영 논리’가 중요했다. 또 5월 광주 대학살을 저지른 무지막지한 조국에 맞서기 위해 받아들인 북한의 주체사상이 이들의 비민주적 성격, 즉 ‘폐쇄적 패권주의’를 형성했다.

그 특성이 마침내 통진당 비례대표 부정선거 사태에서 대중 앞에 공개됐다. 정치적 책임보다는 “당원들의 명예”를 강조한 것, “국민들의 눈높이를 당원의 눈높이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발언, 그리고 마침내 ‘머리끄덩이녀’로 대표되는 폭력 사태는 여전히 고착화된 집단기억에서 비롯된 ‘자기 보존 의식’과 ‘닥치고 단결’식의 비민주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바로 집단의 덫에 빠져버린 것이다’(233쪽) 경기동부연합은 그렇게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었다.

여론의 ‘종북몰이’가 거센 데다 내란음모 사건은 최종 판결이 나기 전에 이미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강하지만, 경기동부연합은 여전히 단호하게 맞서는 중이다. '외부의 억압' 앞에서 이들의 굳건한 자기 보존 의식과 단결력은 지칠 줄 모른다. 물론 지금은 어느 정도 고립을 극복하고, 대부분 진보 세력과 시민사회 진영이 이들과 다시 연대하고 있는 분위기다. 임미리는 이 단결력에서 번질 수도 있는 들불을 염려하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대중에게도 경기동부연합의 집단기억처럼 '머리끄덩이녀'의 기억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 거다. 더구나 언론에 공개된 ‘RO 녹취록’에서 드러난 이들의 ‘혁명적 정세 인식’은 그냥 한 개인의 생각이라며 넘어가긴 어려울 정도로 지나치게 결연했다. 또 이들을 과도한 상상에 둘러싸인 집단으로 여기게끔 했다. 경기동부연합에 우선 절실한 것은 외부의 적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대중과 한참 괴리된 현실 인식을 깨닫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들의 집단기억과의 투쟁이 아닐까. ‘광주대단지 키드’들은 오히려 그들만의 집단기억에 안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남종합시장에서 짝퉁 신발을 사던 때가 생각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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