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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픽하이 타블로와 펀치라인 진화론 3

 

“나는 Epik의 타블로. 삶으로부터 맘으로. 내 맘으로부터 라임(Rhyme)으로. 직빵으로, 저 TOP으로. 입을 다물고, Listen Close, 피와 땀으로 만든 Flow smoke the dopest muthafuckas like hydro~” [Go!, Map Of The Human Soul, 에픽하이]

 

2003년, 고3 수험생이던 나는 수학 문제를 풀 땐 꼭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었다. 즐겨듣던 장르는 대부분 힙합이었고, 돌이켜보면 문제풀이보단 음악에 집중했던 날이 훨씬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한 남자의 래핑이 내 귀에 심하게 꽂혔다. “내 사주팔자조차 예측 못한 운명의 삑사리”라고 자신을 표현하는 이 남자, 에픽하이의 타블로. 그 잘난 대학교를 나와 랩한다는, 좀 있어보이는 그 경력도 경력대로 끌렸고, 무엇보다 그의 가사에 확 끌렸다. 비유와 은유가 풍부하다는 점을 넘어 이건 뭔가 좀 확실히 재치가 있는 것이었다.

 

에픽하이 1집 [Map Of The Human Soul], 2003

 

이후 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에픽하이 이야기를 입에 달고 다닐 정도였다. 지금도 난 개인적으로 1집을 에픽하이 앨범 중 가장 명반으로 꼽는다. 그럼 이 에픽하이의 첫 앨범 [Map Of The Human Soul] 중 당시 인상 깊게 들었던 타블로의 가사들을 대략 살펴볼까.

 

실력이 식품이라면 나는 폭식가 [Go!]
“비싼 Ivy University 학비 투자 했던 부자 부모님의 돈은 그저 숫자. 차, 구찌, 프라다, 몇 백만원 값의 술잔. 타투(Tattoo)가 사치를 상징하면 넌 야쿠자 [하늘에게 물어봐]
삶이 한 문장이라면 우린 느낌표!” [Get High]

 

친절하게 밑줄을 함 그어봤다. '아, 이런 표현 좋네'라며 들었던 타블로의 가사엔 드러나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걸 굳이 공식으로 써본다면 ‘A가 b라면 C는 B’인데, 이런 걸 대구법이라고 하던가? 아무튼 이러한 작사를 타블로가 국내에서 제일 처음 했다고 할 순 없겠으나 적어도 그가 이런 작사를 눈에 띄게 선보였다는 점은 부정하지 못할 것 같다. 이 공식이 여러번 반복된 걸 보면 어쨌든 이 공식이 그 나름의 ‘펀치라인(Punch-line, 흔히 랩 가사 중 극적으로 귀에 꽂히는 한 문장을 이르는 말)’을 만드는 방법이었던 셈이다.

 

그의 이런 '대구법(?) 펀치라인'은 다음 앨범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레츠고우.

 

삶이란 갑 속에 이 순간은 돛대. Party like it‘s your birthday” [평화의 날, High Society]
“Blind 교과서. 사상의 학대. 보수주의가 강요하는 상상의 낙태. 허탈한 사회 먹이 연쇄 때문에 학교는 다니면서 인생은 자퇴. … 서랍에 적힐 태극기 너와 내겐 아직 해방기념일 없으니 여전히 이 젊은이 위험한 꿈을 꿔. 무법자 눈을 떠. 화염병이 불 붙어. 저 하늘에게 충성. 심판의 칼을 차리. 이 땅의 법이 출석부라면 나 결석하리 [Lesson2, High Society]

 

MBC 음악캠프 화면 캡쳐

 

캬... 이때만 해도 에픽하이는 참 '빨갰다'. 아마 [High Society] 앨범 때문에 타블로의 학력 위조 의혹이 제기됐을 때 "타워팰리스 사는 미국적자가 왠 사회주의?"라는 비난도 나왔을 것이다. 암튼 이 흑역사는 걍 넘어가고 (ㅎㅎ) 이왕 펀치라인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얘기를 살짝 더 해보자. 포털 검색을 해보면 이 펀치라인을 둘러싼 한 치열한 논쟁 구도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타블로 펀치라인이 좋아요, 아니면 스윙스 펀치라인이 좋아요? 님들 생각은 어떠삼?” 대략 이런 식이다. 나도 1999년도 중2 였으면 이런 질문을 올렸을 것 같다.

 

그럼 이어서, TV쇼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로 더욱 주가를 올린 스윙스의 펀치라인, 어떤 게 있나 살펴볼까. 흠, 누가 더 나을까요.

 

“이제는 나를 디스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지. 너는 Tiger JK와 다르게 미래가 없지” [Punch Line 놀이, Upgrade]
“네가 한 대 때리면 난 네 대 갚아. Get it? 어린 놈아. 그게 너와 나의 세대 차이야. … 누가 날 알아. 물론 남 탓하기 없기. 근데 넌 요즘 권투계랑 똑같아. 알리 없지” [불도저, Double Single]
“길기만 한 경력을 축구공만한 크기의 양으로 축소해서 까. 싸커(soccer) 킥으로 차. 왜냐면 너네 새끼들은 다 골 때리니까” [심각하다] (그 유명한 Dead‘P 디스곡...)

 

Mnet 쇼미더머니 3 홈페이지 캡쳐

 

아하하하… 웃지 않을 수 없는 말장난이다. 가사를 잘 뜯어보면 2중 의미를 띌 수 있는 단어나 띄어쓰기를 변용해 이래저래 문장을 조립하는 식이다. 이런 식의 가사=펀치라인이라고 부르는 게 우리나라에서는 몇년 전부터 사전적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타블로도 이런 식의 펀치라인을 많이 썼다.

 

“막가는 청춘은 보편 타당. 상관 없어 좋아, 적당한 데카당스. 사계절 바캉스 노래 불러보세. 투컷, 미쓰라, 타-블로(불노, 不老)의 샘” [뚜뚜루, High Society]
“내 목소리는 비트의 스키니진. fucker 딱 달라붙어. my technique lyrical kamasutra. 넌 겨울의 반팔티, ‘아마 추워’. 답답해, 니 가사는 마약중독자처럼 약해. 망해도 누굴 탓해. 씹어봤자 넌 그저 껌뿐이었어. 니 정신상태는 포장마차 싸움꿈, 병들었어” [Eight By Eight, Pieces Part One]
“너는 절대 못 껴. 입을 개처럼 풀어뒀어. 액자를 벽에 걸 때처럼 그럼 못 써” [Supreme 100, e]
“세상에 이끌려 가다간 첫 반만 채워진 답안지처럼 뒤틀려 다” [Shopaholic, e]

 

이걸 두고 누리꾼들께선 타블로가 낫다느니, 아니다, 스윙스가 낫다느니 몇년째 논쟁 중이다. 누가 나을까? 음...... 그런데 사실 이런 식의 펀치라인은 그냥 흥미거리에 그친다는 게 내 개인적 견해다. 가만 보면 가사를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고개를 자꾸 갸우뚱하게 된다. 가사를 보지 않고서는 무슨 뜻인지 캐치해내기 어려운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게 최근 몇년 간 랩퍼들이 구사한 펀치라인의 단점이기도 했다.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다는 거. 그런데.

 

에픽하이의 따끈따끈한 새 앨범 [신발장]에서는 타블로가 뭔가 좀 다른… 한 발 더 나아간… 한 차원 더 높은… 아무튼 그런 펀치라인을 선사한 것으로 보인다. 역시 아주 조심스럽게 개인적인 생각임을 전제하면, 이번 펀치라인은 스윙스에게서 '펀치라인킹'이란 이름을 단박에 제거...할 걸...?

 

에픽하이 새 앨범 [신발장], 2014

"바늘 대신 이어폰 꼽고 연예인들도 줄 서게 하는 내 음악은 프로포폴. 10년간 니들 머리위에서 날뛰는 내 랩은 더 떠들어. 층간소음, 난 세대를 넘나들어” [부르즈 할리파]

 

음… 역시 스탠포드의 힘인가? 이건 뭔가 앞서 나온 단어를 유희적으로 조립한 가사들과 좀 다르다. 또 이 앨범에서 펀치라인이라 할 만한 건 이 문장 외엔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 억지로 단어를 쪼개거나, 띄어쓰기를 비틀거나 하지 않아 듣는 사람 입장에서 중의적인 표현이 담겨 있단 걸 쉽게 눈치챌 수가 있다. 정리하면, 이 앨범의 유일한 펀치라인 한 마디가 새로운 형식을 갖춘 데다 가사 전달까지 잘 된다는 얘기다.

 

여기에 더해 ‘프로포폴’과 ‘층간소음’이란 키워드를 선택한 것. 이 역시 '우와'한 부분이다(이것도 펀치라인인 거 아시죠?). 연예인들이 줄줄이 프로포폴 투약으로 법정에 섰던 일과 층간소음으로 이웃끼리 칼부림까지 났던 요즘 세태를 떠올려보면, 이 가사 너머엔 꽤 엄청난 맥락이 있다. 나름의 풍자라면 풍자다. 그 맥락을 제거하고 이 가사를 알아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건 내가 사회부 기자여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런데 사실 에픽하이 1집에서 이런 류의 펀치라인 예고편이 제시된 바 있다. 서프라이즈. 이 앨범 마지막 보너스 트랙에서 좀 색다른 ‘기가 막힌’ 펀치라인이 나온다.

 

“기가 막혀, 러시아워(Rush Hour) 길 같이. Wack MC(실력 없는 래퍼들을 이르는 단어)들이 마구간보다 말이 많은지? 말 나왔으니 따지자면 니넨 정치와 GOD와 똑같이 ‘거짓말’로 돈 벌지” [Watch Ya Self, Map Of The Human Soul]

 

오우... ‘기가 막힌’ 걸 출근길 꽉 막힌 도로에 비유하고, Wack MC들의 ‘말(言)’은 갑자기 ‘말(馬)’이 된다. 사실 이건 앞서 살펴본 말장난스러운 펀치라인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주목할 건 다음 대목. GOD의 유명한 ‘거짓말’이란 노래는 정치인들의 거짓말과 같은 차원으로 넘겨 다차원의 비유를 형성한다. 확실히 이건 이번 앨범에서 보여준 펀치라인의 조상님 유전자 격이다. 이 유전자가 몇 개의 앨범을 거쳐 이제 발현된 것일까? 펀치라인에도 밈(Meme)이 있단 말인가.

 

 

사실 나는 에픽하이의 이번 새 앨범이 그들의 첫 앨범의 감성으로 어느 정도 돌아갔다고 느낀다. 두 앨범 사이엔 10년의 격차가 있지만, 확실히 유전적으로 연결돼 있다. 증거? 없다. 다만 첫 앨범은 [막을 내리며]란 곡으로 끝났고, 새 앨범은 [막을 올리며]란 곡으로 시작한다는 것...^^ 물론 이런 단편적인 사실과 앞선 펀치라인 유전자 운운하는 이야기를 끼워맞추는 건 우습고 억지스럽지만…. 하지만 10년 동안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해오면서 '시류를 너무 탄다'라는 비판도 들었던 에픽하이가 사실 뭔가 그들만의 색깔을 갖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앨범임엔 틀림없다.

 

10년 동안 어디선가 생존해왔던 외로운 이 유전자. 그를 위해 10년 뒤엔 같은 감성이지만 더 진화한 타블로의 펀치라인을 듣고 싶다. 이건 10년 넘은 타블로 팬심 유전자를 지녀서 하는 말이다.

 

"사치스러운 눈물로 동정을 산 후 그 빚은 다음 사람이 대신 갚는 그 Reason" [헤픈 엔딩]